대규모 투자·관세 딜·핵잠수함까지 포괄한 ‘빅딜’
한국 3,500억 달러 투자·방산 패키지, 미국은 관세 조정·조선·원전 협력 약속
외환조달 상한·디지털 규범·강제노동·환경까지 한 번에 묶은 ‘경제·안보 패키지’
“확장억제 강화 vs 재정·외교 리스크 확대” 국내 정치권·전문가 평가 엇갈려
지난 14일 공개된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공동 설명자료는 경주 정상회담 결과를 토대로, 한미동맹을 전면 재설계하는 수준의 경제·안보 패키지 합의를 담고 있다. 두 정상은 대규모 대미 투자와 관세·통상 규범, 외환시장, 방위비, 원자력·조선 협력, 북한·대만해협·인도‧태평양 질서까지 한 번에 묶는 이른바 ‘경주 선언’을 통해 한미관계를 전통적 군사동맹에서 ‘총체적 전략동맹’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한국이 약속한 대규모 대미 투자다. 공동 설명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7월 발표된 ‘한국 전략 무역 및 투자 합의’를 재확인하며, 조선, 에너지, 반도체, 의약품, 핵심광물, AI·양자컴퓨팅 등 전략 산업 전반에 걸쳐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 분야 승인 투자, 양국 대표가 서명할 전략적 투자 MOU에 따른 2,0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약속했다.
여기에 8월 발표된 트럼프 임기 내 1,500억 달러 규모의 한국 기업 대미 직접투자까지 더하면, 이번 합의로만 한국이 미국에 약속한 투자액은 총 3,5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단일 동맹국 투자 기준 사상 최대 수준이다.
대신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해 독특한 관세 체계를 도입한다. 2025년 4월 2일자 행정명령 14257호에 따라 한미 FTA·MFN(최혜국) 관세율과 15% 중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이른바 ‘최저 15% 룰’을 채택했다. 한국산 자동차와 부품, 목재 제품에 대해서는 232조 관세를 15%로 인하하는 동시에, 기본 관세가 15% 이상인 품목엔 232조 관세를 추가 부과하지 않고, 15% 미만 품목은 기본 관세와 232조 관세를 합산해 15%를 맞추도록 했다.
의약품 관세는 15% 상한을 두고, 제네릭 의약품·화학 전구체, 미국 내 생산되지 않는 특정 천연자원, 일부 한국산 항공기·부품 등에 부과된 추가 관세는 철폐하기로 했다. 반도체와 장비에 대해서는 “한국 반도체 교역 규모 이상의 교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래 합의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약속해, 향후 미·중 반도체 갈등 속에서 한국에 대한 차별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를 넣었다.
통상 전문가는 “투자·관세·안보를 한 묶음으로 거래한 전형적인 패키지 딜”이라면서도 “15% 하한 설정은 일부 한국 수출기업에 추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산업별 이해득실 분석과 후속 보완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에는 한국 외환시장 안정에 관한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문구도 포함됐다. MOU에 따라 한국과 미국은 MOU 이행으로 인해 시장 불안을 야기해선 안 된다는 데 합의하고, 한국이 어느 특정 연도에도 연간 200억 달러를 초과하는 조달을 요구받지 않도록 상한을 설정했다.
또한 한국은 달러를 가급적 시장 직접 매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달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조달이 원화 급변동 등 시장 불안을 초래할 우려가 있을 경우 조달 시기·규모 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미국은 이를 “신의에 따라 적절히 검토한다”고 명시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비공식 브리핑에서 “미국 측과의 협의를 통해 ‘과도한 외환조달 압박은 없다’는 이정표를 만든 것”이라며 “시장엔 오히려 안정 신호”라고 평가했다. 반면 야권에서는 “연간 조달 규모와 방식에까지 미국과 합의한 것은 통화·재정 주권을 지나치게 노출한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민간 부문의 상업적 유대 강화도 이번 합의의 중요한 축이다.
한국 기업의 1,500억 달러 대미 직접투자, 대한항공의 GE 엔진을 장착한 보잉 항공기 103대, 360억 달러 규모 구매, 미국산 상품의 대한국 수출 확대를 위한 ‘Buy America in Seoul’ 연례 전시회 등이 그 예다.
조선·원전 협력은 한미 산업 구조를 바꾸는 수준의 내용이 담겼다. 한국은 미국 조선소와 인력에 대한 투자, 조선소 현대화, 인력 양성, 유지·보수 협력을 약속했고, 미국은 이를 통해 상업용 선박과 전투함 수를 신속히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원자력 분야에서도 미국은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과 자국 법령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이어질 절차를 지지하고,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하며 연료 조달 방안을 포함한 협력을 약속했다.
이는 한미 원자력 협력의 수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조치로, 동맹 차원의 전략 자산 공유를 넘어 한국 자체의 전략 자산 보유를 전제로 한 협력이라는 점에서 파장이 크다. 군사 전문가는 “한국이 실질적인 핵추진 잠수함 능력을 갖추면, 동북아 해양 패권 구도와 대북·대중 전략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서도 “핵확산·지역 안보 균형 문제로 주변국 반발과 국제적 논쟁이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안보 분야에서는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한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지속 주둔과 핵을 포함한 모든 범주의 능력을 활용한 확장억제 제공을 재확인했고, 양국은 핵협의그룹(NCG)을 통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한국은 국내 법적 요건을 충족하는 범위에서 국방비를 GDP 대비 3.5%까지 증액하는 계획을 공유했고, 2030년까지 미국산 군사장비 구매에 250억 달러, 주한미군을 위한 330억 달러 규모의 포괄적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위해 한국이 대북 연합 재래식 방위를 주도할 수 있는 군사 능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미국 첨단 무기체계 획득과 양자 방산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여권은 이를 두고 “돈을 더 내되, 정보·지휘·전력 측면에서 더 많은 권한과 능력을 확보하는 딜”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야권은 “수십조 원대 방산 패키지가 중장기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견제에 나서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 디지털 서비스 정책에서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불필요한 장벽을 두지 않기로 약속하고, 위치·재보험·개인정보 등을 포함한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하기로 했다.
WTO 전자적 전송물 관세 모라토리엄의 영구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며, 글로벌 디지털 통상 규범 형성을 위한 공조 의지도 드러냈다.
노동·인권 분야에서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노동권 보호와 함께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상품 수입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고, 환경 부문에서는 WTO 수산보조금 협정의 충실한 이행과 국내 환경법의 효과적 집행을 강조했다. 이는 미국이 최근 무역 협정에서 중시해 온 ‘가치 기반 통상’을 한미동맹 축으로 확장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법조계에서는 “디지털·노동·환경 기준이 통상 협력의 조건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한미 간 ‘규범 동맹’이 형성되는 셈”이라며 “세계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이 신뢰를 얻는 장점도 있지만, 국내 규제·제도 정비에 상당한 비용이 뒤따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외교·안보 측면에서 두 정상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 이행, 북한의 WMD·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포기와 국제 의무 준수를 촉구하고, 일본과의 3자 협력 강화, 항행·상공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해양법 질서 수호,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안정 유지 및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를 확인했다.
이는 한국을 한미일 3각 협력과 대만해협 안정,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등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축으로 위치시키는 구도다.
외교 전문가는 “이번 문서는 한미동맹을 더 이상 한반도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태 전체 질서 관리 체계 안에 편입시키는 선언”이라며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 북중러 공조 심화 등 역내 균열 요인도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치권과 전문가 사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여권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인정받은 이재명 정부와 미국의 새 행정부가, 투자·안보·규범을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동맹 모델을 만들었다”며 “한국 기업과 노동자에게 대규모 기회가 열렸다”고 강조한다.
야권은 “관세 15% 하한, 대규모 방산·조선·원전 패키지, 외환조달 상한 등 굵직한 조항이 향후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한국 경제·외교를 장기간 구속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합의 범위가 워낙 넓고 숫자가 크기 때문에, 국내 국회 비준 과정과 후속 이행계획에서의 투명성·공론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산업별 투자·관세 효과에 대한 정밀 분석, 외환조달 구조 변화가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 핵추진 잠수함·우라늄 농축 관련 국제 규범·비확산 체제와의 조화, 디지털·노동·환경 규범 이행을 위한 국내 법·제도 정비 등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한 국제정치학자는 “이번 경주 합의는 한미동맹을 ‘위험을 감수하며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동맹’으로 진화시키는 출발점”이라며 “이제 중요한 건 서명된 문구 자체가 아니라, 이를 한국 사회가 어떻게 소화하고 관리할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번 공동 설명자료는 한미동맹을 단순한 군사 안전보장 틀에서, 투자·통상·금융·에너지·디지털·규범·안보를 포괄하는 거대 플랫폼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읽힌다. 역사상 처음으로 경주에서 국빈을 맞이한 이번 정상회담이 ‘새로운 장’의 서문이 될지, 혹은 과도한 부담을 떠안은 무거운 계약서로 남을지는 앞으로 몇 년간 한국 정부와 사회가 이 합의를 어떻게 구현하고 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보도자료=대통령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