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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정상외교의 본령은 문서, 메시지, 그리고 맥락이다”
  • 이노바저널
  • 등록 2025-11-05 11: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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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통령실 제공

정상외교는 국가의 위상과 신뢰, 그리고 국익이 응축된 최고 차원의 외교 행위다.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 마주 앉는 순간은 단순한 회담이 아니라, 국가의 품격과 전략의 총합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다. 그러한 자리에서 오간 한마디, 한 장의 문서, 한 장면의 연출은 국제사회에 오래 남는 정치적 신호가 된다. 그렇기에 정상외교는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라 치밀한 설계의 예술이다.


최근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SNS상에서 두 차례의 한미 정상회담을 향해 던진 비판은 단순한 정치적 공세가 아니다. 그는 절차적 부실, 소통의 혼선, 상징의 오판이라는 세 갈래 문제를 지적하며, 외교의 기본기가 무너진 현실을 경고했다. 대통령실은 이에 맞서 세부 합의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실질적 성과를 강조했다. 하지만 두 입장 사이에는 본질적인 괴리가 있다. 논점은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 외교인가’이다.


이낙연 전 총리가 지적한 절차적 흠결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정상회담이 공동 발표문이나 합의문 없이 종료된 것은 외교 관례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대통령실이 뒤늦게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미 간에는 3,500억 달러 규모의 금융투자 패키지, 15%의 상호 관세 인하, 반도체와 조선 분야의 구체적 협력이 논의되었다. 이는 협상이 실질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외교에서 ‘형식’은 곧 ‘신뢰’다. 문서화된 합의는 이해의 최소공배수이자 향후 분쟁의 최대 방어막이다. 공동 문건이 없는 상태에서 사후 설명으로만 결과를 보완하는 방식은 해석의 여지를 낳고, 결과적으로 외교적 신뢰를 약화시킨다. 문서 없는 합의는 외교적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고, 결국 정치적 해석의 영역으로 빠져든다.


이와 더불어 소통의 불일치는 외교 신뢰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정상회담 이후 한국과 미국 양측이 발표한 내용은 여러 지점에서 엇갈렸다. 투자금 규모와 구조, 반도체 협상의 포함 여부, 농산물 개방 범위 등 핵심 사안에서의 불일치는 단순한 실무 착오로 볼 수 없다. 대통령실은 이후 상세한 구조를 공개하며 해명을 시도했지만, 이미 첫 발표에서 생긴 혼란은 시장과 외교 관계자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정상외교에서 메시지는 내용 그 자체이자 신호다. 한미 양국의 발표가 엇갈렸다는 것은, 전략적 조율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외교의 언어는 정밀해야 한다. 숫자의 차이보다 위험한 것은 ‘해석의 차이’이며, 해석의 차이는 언제나 신뢰의 균열로 이어진다.


상징의 차원에서도 문제는 드러났다. 외교 선물은 단순한 의전이 아니라, 상대국의 정치·문화적 맥락을 읽는 예술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 구호가 적힌 모자에 사인을 받아 공개한 행위는, 미국 내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금관을 선물한 일은, 미국 사회의 ‘왕정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문화적 상징을 간과한 사례로 남았다. 선물은 친선의 표현이 아니라 메시지의 설계다. 외교에서 상징은 말보다 깊게 각인되고, 사소한 오판 하나가 국가 이미지를 흔든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이 밝힌 세부 합의 내용에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외환시장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연간 200억 달러 상한을 설정하고, 투자금 회수의 안전장치를 마련했으며, 자동차와 의약품 등 주요 품목의 관세 인하를 구체화한 것은 분명 실질적 진전이다. 특히 ‘상업적 합리성’을 명시하고, 손실을 다른 프로젝트에서 상쇄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한 것은 정치적 약속이 아니라 금융공학적 방어책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성과조차도 공동 합의문이라는 형식적 틀 속에서 공개되었다면, 훨씬 더 큰 신뢰와 외교적 레버리지를 확보했을 것이다. 지금의 설명은 ‘우리만의 설명’으로 남아 있다.


정상외교의 본령은 세 가지다. 첫째, 문서다. 합의의 내용을 문서로 남기는 것은 기록을 위한 형식이 아니라, 국가 간 신뢰를 담보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둘째, 메시지다. 회담 전·중·후의 모든 발언은 단어 하나까지 조율되어야 하며, 발표의 타이밍은 양측이 동시에 맞춰야 한다. 셋째, 맥락이다. 상대국의 정치 지형, 사회적 정서, 문화적 상징을 세밀하게 읽어내는 감각이 외교의 품격을 결정한다.


정상외교는 보여주는 정치가 아니라, 남겨두는 외교다. 한 장의 사진, 한 문장의 합의, 한 가지 상징이 훗날 그 나라의 외교사를 규정한다. 외교는 속도가 아니라 정확도의 문제이며, 정파의 논리가 아니라 신뢰의 기술이다. 이번 논쟁이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외교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서로 약속하고, 메시지를 일관되게 맞추며, 맥락을 세심히 읽는 것 — 그것이 진정한 국익의 출발점이다.


이제 대한민국 외교는 화려한 이벤트의 외교를 넘어, 체계와 신뢰의 외교로 나아가야 한다. 정상외교의 품격은 말의 크기가 아니라 기록의 깊이에서 완성된다. 문서로 남기고, 진실로 설득하며, 맥락으로 이해하는 외교. 그것이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신뢰받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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